그리스의 스포츠 문화

스포츠 문화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 문화에 대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별로 알아보자. 호머시대를 통해 서양 신체 문화의 기원과 유래를 확인할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 체육의 제도와 내용을 파악하고, 스포츠 문화의 유형과 성격을 이해하고,  또한 그리스 체육과 스포츠 문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호머시대의 체육과 스포츠


호머시대의 체육


호머의 작품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영웅을 두 가지 속성으로 의인화시키고 있다. 즉 아킬레스(Achilles : Achilleus)는 힘, 용기, 기술, 인내력 등을 갖춘 '행동의 인간(the Man of Action), 오디세이는 판단력, 총명성, 웅변술 등과 같은 자질을 갖춘 '지혜의 인간(the Man of Wisdom)'으로 묘사되고 있다. 9) 호머시대는 특정한 교육기관이나 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체육의 목표는 행동의 인간, 실천적 인간의 육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체력, 인내력, 기민성, 용기 등과 같은 자질의 함양을 위해 전차경주, 권투, 레슬링, 경주(競走), 도약, 투원반, 투창, 궁술 등과 같은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호머시대의 스포츠: 장례경기


호머시대에 스포츠란 용어는 없었지만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나타나는 운동경기 종목은 전차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도약, 투원반, 투창, 궁술, 무용 등 다양하다. 《일리아드》는 전쟁에서 죽은 영웅을 기리기 위해서 장례경기가 개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디세이>는 손님환대 경기, 구혼경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운동경기는 호머시대 영웅들의 생활 속에 필수적인 것으로 존재했으며, 운동경기를 통하여 신체적 탁월성(Arete)을 과시하였다. 당시는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운동경기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영웅들은 운동경기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스파르타의 체육


스파르타 사회와 교육


1) 스파르타의 사회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 있는 도시국가(Polis)의 하나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상업 중심의 도시였다. 스파르타 사회는 인구약 5~10%에 해당되는 시민계급에 속했던 스파르타인, 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 국민의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페리오이코이(Perioikoi), 농업에 종사하던 헬로타이(heilotai)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 스파르타의 교육


스파르타는 지배 계급이 소수파였기 때문에 정치 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치를 내포한 민주정치 체제에서 점차 군국주의적인 체제로 변모되었으며, 시민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전사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인들은 7세부터 30세까지 국가 통제 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의 체육


1) 체육의 목적


스파르타는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해야 했기 때문에 강력한 전사의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고, 체육활동의 목적은 전사의 육성에 있었다. 체육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 강인한 체력, 선임자에 대한 존경심, 복종심, 용맹, 절제,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는 강인한 인내력 등과 같은 자질을 갖추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2) 체육의 제도와 내용


스파르타의 체육은 30세까지 실시되었다. 7세부터 시작되는 국립 공동교육소의 교육은 혹독하였다. 소년들은 훌륭한 시민 중에서 선출된 엄격한 감독관인 파이도노무스(Paidonomus: 파이도노모스, Paidonomos)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모든 소년들은 소대 이라이(Lau)와 4개의 이라이로 형성된 중대 보아이(Bovau)로 편성되었다. 이라이에서는 운동 기능이 우수한 소년이 선출되어 제대장(長)의 역할을 하며 지도를 담당하였다. 보아이는 20세가량의 청년 지도자 에이렌(Eiren)이 담당하였다. 교과는 유희, 투창, 중량거, 도약, 레슬링, 경주, 소풍, 수영, 체조 등이었고, 그 속에는 음악과 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12~14세까지 소년들의 신체적 훈련을 강화했으며, 그 이후부터 18~20세까지를 사관후보생, 즉 에페비(Ephebi:Epheboi: Epheboi)를 육성하는 예비 교육기간으로 보았다. "10) 18세가 되면 에페비가 되었다. 에페보이가 되면 군사 훈련, 무장 훈련, 국경 지역 순시 훈련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20세가 되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선서를 하고 군사 훈련과 실전에 참가하였다. 30세까지는 군사훈련과 규정된 신체 단련에 전념해야만 했으며, 전시에도 신체 훈련은 계속되었다.

스파르타의 체육 내용은 군사훈련의 수단이 되는 볼게임을 비롯하여 궁술, 수영, 달리기, 격투, 레슬링, 권투, 판크라티움(pancratium: 판크라티온, pankration) 마술, 투원반, 투창, 행군 등이었다. 무용으로는 비바시스(bibasis: 체육무용), 호모로스(homoros: 종교무용), 피릭(Pyrrhic: 군사무용) 등이 있었으며, 여성들도 18세까지 신체 훈련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 스포츠를 엿볼수 있는 조각상

아테네의 체육


아테네 사회와 교육


1) 아테네의 사회


아테네(Athens : 아테나이, Athenai)의 시민은 폴리타이(politai), 메토이코이(metoikoi), 도올로이 (douloi)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패권을 쥐게 되면서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경에 황금시대를 맞았다. 그리스의 사회와 문화는 모든 면에서 종교와 깊은 관계를 갖고 발달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인들은 신화적 세계를 벗어나 우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그러한 태도는 과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철학도 출현하게 되었다.

2) 아테네의 교육


기원전 4세기 경 아테네 청소년 교육 체계의 교과목은 문법(grammar, Grammatike), 음악(music: Mousike, 문학의 개념 내포됨), 체조(gymnastics, gymnastike) 등이었으나 여성의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는 체육을 통해 시민의 심신 발달을 추구하였고, 음악을 통해 지적발달과 정서적 순화를 꾀함으로써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된 인간의 육성을 지향하였다. 그것은 곧 '행동의 인간'과 '지혜의 인간' 그리고 '미와 조화'라는 그리스인들의 이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테네의 체육


1) 체육의 목적


아테네 체육의 목적은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된 인간의 육성을 지향한 것으로, 역사시대 최초로 이상적이고 균형적인 체육 가치관을 토대로 한 체육의 모습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스포츠를 철학, 음악, 문학, 회화, 특히 조각 등과 비교하여 똑같이 중요하고 존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 따라서 아테네 체육의 목적도 진(眞)·선(善)·미(美)를 추구하며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된 인간의 육성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2) 체육의 제도와 내용


아테네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병약한 아이는 공공보육소에서 양육하고, 건강한 남자 아이들만 교육을 받게 하였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어머니, 보모, 사설학교나 국가 기관의 지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7세부터 여자는 가정에서, 남자는 팔라에스트라(Palaestra: 팔라이스트라, Palaistra)와 다디스칼레움(Didascaleum: Didaskaleion)에서 교육을 받았다. 팔라에스트라에서는 파이도트리베(Paidotribes: Paidotribi)라는 체육지도자와 운동기술을 가르치는 짐내스트(Gymnaste:Gymnotribi), 교사였던 페다고거(pedagogue: paidagogos)가 있었다. 12세부터는 경주(running), 도약(jumping), 투창, 투원반, 권투, 레슬링, 수영, 판크라티온(pankration) 등과 이른바 5종경기(Pentathlon) 중심의 체육이 실시되었고, 16세가 되면 짐나지움(Gymnasium: 김나시온: Gymnasion)에서 체육을 비롯하여 철학, 문학 등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대표적인 김나지움은 아카데미(Academy: 아카데메이아, Akademeia), 라이시엄(Lyceum, 리케이온, Lykeion), 키노사르게스(Cynosarges: 키노사르게스, Kynosarges) 등이 있었다. 18~20세까지 아테네의 청년들은 군사적 훈련을 받았으며, 에페비(에페보이)를 양성하였다.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시민군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신체적 능력을 갖춘 18세의 청년들을 에페비로 육성하였다.

아테네 체육은 고대 사회에서 심신의 조화적인 발달이라는 균형적인 목적 개념을 정립하였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원시시대의 생활과 신체 문화


그리스의 스포츠 : 범그리스 경기대회


범그리스 경기대회: 4대 제전경기


그리스인들은 헬렌의 후예라는 동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범그리스적인(Panhellenic) 정신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 정신의 고양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 고도로 조직화된 제전경기(祭典競技), 즉 범그리스경기(Panhellenic Games)였다. 선사시대 북쪽으로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주하여 온 아카에아족(Achaea)과 도리아족에 의해 시작되었던 제전경기는 도시국가나 촌락마다 수백 개가 넘었다. 모두가 신을 숭배하는 제례의식과 연계된 것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제전경기는 올림피아, 피티아, 이스트미아, 네메아제였다.

1) 올림피아제(Olympia Festival)


올림피아 경기대회의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으며, 고대 올림픽이 개최된 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올림피아 평원 엘리스였다. 제우스(Zeus)를 주신으로 하였으며, 기원전 776년부터 기원후 393년 (일부서적에는 395)까지 4년마다 개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창기의 경기 종목은 경주, 즉 달리기(스타디온) 뿐이었으나 최후에는 20여 종목이 추가된 스포츠 축제가 되었다. 승자에게 주어진 상은 올리브관(crown of olive leaves)이었다.

2) 피티아제(Pithia Festival)


코린트항의 북쪽 해안 델피(Delphi), 즉 델포이에서 열린 것으로 올림피아제 다음가는 성대한 제전경기였다. 델피에서는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을 주신으로 섬겨 왔지만 미케네시대부터 아폴론(Apollon)을 주신으로 섬기게 되었다. 피티아제는 주신 아폴로(Apollo)를 예찬하는 행사로 처음에는 음악경연대회를 하는 축제에서 출발하였으나 델포이 성전 이후인 기원전 586년부터 4년마다 올림피아드(올림피아제가 열리는 해로부터)의 3년째 해에 열리다가 기원전 582년부터 달리기에 기마 경기와 전차 경주가 추가되었다. 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3) 이스트미아제(Isthmia Festival)


이스트미아 경기대회는 코린트 해안 남쪽의 이스트모스 바다의 신(神)인 포세이돈을 받들어 모시는 성지에서 개최되었다. 이스트미아제는 올림피아제에 버금가는 규모로, 올림피아드의 2년째와 4년째에 열려 다른 경기와는 달리 2년마다 개최되었으나 기원전 146년 로마의 그리스 정복으로 인하여 코린토스가 완전히 파괴되자 그 운명이 다하게 되었다. 포세이돈(Poseidon)을 주신으로 한 행사였으며, 경기종목으로는 스타디온 경주, 전차경기, 기마경기 등이 있었고, 상으로는 소나무 관을 주었다.

4) 네메아제(Nemea Festival)


네메아란 명칭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화가 있으며, 코린트항의 남서 계곡에서 열린 이 제전은 기원전 573년부터 올림피아드의 2년째에 열렸다. 경기 종목은 경주, 레슬링, 판크라티온, 5종 경기, 무장 경기, 전차경기 등이었다. 주신은 올림피아제와 마찬가지로 제우스였으며, 승자에게는 야생 셀러리관(crown of wild celery)을 상으로 주었다.

 

고대 올림픽


1) 올림픽의 기원에 관한 설


올림피아제의 기원에 관한 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헤라클레스가 엘리스(Ellis)의 왕 아우게이아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승리를 축하하는 경기를 개최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펠롭스가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와 벌인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개최했다는 설이다.

2) 올림픽의 개최 시기


고대 올림픽이 1년 중 어느 시기에 개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여름에 열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경기대회의 운영


(1) 휴전 약속: 전쟁을 하다가도 휴전을 하는 소위 '올림픽 정전(Olympic truce)'이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10일전에 정전(停戰)을 선포하면 전쟁을 하고 있던 도시국가들도 상호 휴전에 들어갔다.

(2) 심판 및 참가선수에 대한 규정: 심판은 10명이었으며, 참가선수는 순수한 그리스 혈통의 남자로서 정치·종교적인 형벌을 받은 적이 없고, 엘리스의 역원이 지.덕.체를 겸비했다고 인정된 자였다. 그리고 10개월 이상의 연습, 부정·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요구되었다.

(3) 우승자와 상품: 올리브관이 주어진 것은 올리브가 제우스신의 성목(聖)이었기 때문이다. 제7회 대회 때부터 승자에게는 올리브관이 주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사과의 열매를 주었으나 이피토스가 델피 신탁을 들어가며 "비단과 같이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야생 올리브를 주라”고 한 이래 승자에게 올리브관을 수여하게 되었다.

4) 경기 종목


초기 고대 올림픽에서 실시된 경기 종목은 1~2개 종목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23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주된 종목은 경주(달리기), 도약(멀리뛰기), 투창, 투원반, 레슬링, 5종경기(달리기, 멀리뛰기, 투원반, 투창, 레슬링), 권투, 판크라티온(pankration), 전차경주(chariot and horse race) 등이었다.

(1) 경주走 foot race): 경주(stadion), 즉 달리기는 단거리인 스타이온(stadion, stade) 경주, 스타디온을 왕복하는 디아울로스(diaulos)12) 나스타디아(stadia), 20~24 스타디온을 달리는 장거리경주, 돌리코스(dolichos) 등 다양하였다.

(2)투원반(投圓盤: discuss throwing): 고대 그리스에는 돌 던지기 경기도 있었으나 올림픽 종목에 든 것은 원반던지기(Diskobolia)였다. 호머(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아킬레스(아킬레우스)가 철괴(鐵塊)를 가장 멀리 던지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13)

(3) 투창(槍javelin throwing): 투창경기(Akontismos)는 정확성과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한 경기였으며, 전쟁을 위한 훈련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달되었다.

(4) 도약(跳躍: jumping): 도약경기(Halma)는 멀리뛰기였으나 달려와서 뛰었는지 제자리에서 뛰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5) 레슬링 (wrestling): 레슬링(Pale)은 그리스인의 신체적 힘과 기민성, 우아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스포츠였다. 서서하는 정자세, 즉 스탠딩 레슬링(standing wrestling)과 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그라운드 레슬링(ground wrestling) 두 종류였다.14)

(6) 판크라티온(pankration):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처럼 레슬링과 권투가 혼합된 형태였다.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 허락되었고, 다리 걸기와 발 걸기도 할 수 있었으나 할퀴거나 물기는 금지되었다.

(7) 5종 경기(pentathlon): 5종 경기는 만능 운동선수를 가리던 종목이었다. 원반던지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 순서로 오후 한나절 동안 경기를 가졌다.

(8) 권투(boxing): 그리스의 권투(Pygme)는 격렬하였다. 선수들은 손에 가죽 끈을 감고 싸웠으며, 햇빛을 바라보고 싸우는 상대의 불리함을 없애기 위해 주로 정오에 경기를 하였다.

(9) 전차경주: 전차 경주는 테트리폰(tethrippon)이라는 4두마차경주와 시노리스(synoris)라는 2두전차경주가 있었다. 그리고 당나귀나 망아지가 끄는 전차(수레)경주도 있었으며, 안장이나 발걸이도 없는 경마경주도 있었다.

5) 쇠퇴와 종말


운동경기의 윤리가 매우 강조되었던 올림피아제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상업화되었다. 자연히 승리지상주의 풍조가 만연했고, 직업선수가 등장함으로써 숭고한 그리스의 체육 이상(理想)은 점차 사라지게 됨으로써 쇠퇴의 길로 들어갔다. 종말은 서기 393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왕위에 오르면서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의 신(神)들과 연관된 올림피아의 각종 제전경기도 금지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서기 393년까지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6) 역사적 의의


(1) 그리스의 민족적 단결과 평화 유지에 공헌하였다.

(2)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3) 근대 올림픽의 제창으로 이어져 인류 스포츠 문화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4) 운동 경기 및 체육의 가치와 윤리에 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스의 체육 사상


그리스 체육과 스포츠의 사상적 배경


고대 그리스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는 종교, 신체미학, 군사 등과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다. 첫째는 종교적 배경이다. 그리스는 신(神)들의 땅이었고, 운동경기는 제례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둘째는 군사적 배경이다. 고대 그리스 신체 문화의 발달은 군사 문화와 직결된 것이 많았다. 고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사냥과 같은 생존 활동과 국가 방위였다. 따라서 신체 문화는 달리기, 뜀뛰기, 던지기, 격투 등과 같은 생존 활동이나 전쟁과 관련된 활동을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셋째는 신체미에 대한 숭배 사상이다. 그리스 체육과 신체 문화는 건강 중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체미 숭배 사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철학자들의 체육관


1) 소크라테스의 체육관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는 철학자로서 전통적인 지식보다는 진리를 찾는 일을 교육의 주된 목표와 기능으로 보았으며, 체육은 건강의 유지와 전투력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크세노폰(Xenophon)의 저서에 수록된 소크라테스의 체육에 관한 신념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전쟁이 발생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잘 훈련되지 못한 젊은이가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가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과 힘을 바라보지 못한채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라고 말했다.15) 그는 심신 이원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체육의 목적 개념에는 심신의 건강과 신체미의 추구, 국방력의 강화 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2) 플라톤의 체육관


플라톤(Platon : Plato, 429~347 BC)은 인간이 추구할 기초적인 원리를 정의(正義)라고 보았으며,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만이 진리(眞理)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을 행복의 실현에 두었으며, 교육의 두 영역을 음악(문학, 수학 등도 포함된 개념)과 체육으로 보았다. 그는 음악을 통해 미(美)와 선(善)에 관한 상상像)을 자극하여 우아한 영혼을 가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체육을 통해 전사로서의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체육관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에서 개인의 발달을 세 단계로 파악하였다. 첫째, 신체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 둘째,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 -욕망, 열정-이 두드러지는 시기. 셋째, 이성의 우위에 의해 전체 성장과정의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는 시기 등으로 파악했다. 그는 이 세 단계에 상응하는 교육을 “신체의 교육, 인격의 교육, 지력의 교육”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영혼을 강조했으나 체육도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 중 하나로 파악하였다. 그는 《정치학》에서 체력 훈련과 군사훈련을 강조하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체육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신일체론적 사고를 지녔으며, 체육을 교육의 기본적인 영역으로 파악하였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체육은 건강과 국가적 (군사적) 임무 수행능력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체육을 통해 추구한 것은 신체적 탁월성, 즉 건강, 미, 훌륭한 체격, 경기능력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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