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성공 비결

축구의 성공 비결


축구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그 규칙들의 단순함으로 이해된다. 보편적인 것에 일정 부분 수정을 가한 축구의 단순한 규칙은 축구의 본질을 규정해 준다. 선구자들은 축구의 특색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축구의 특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기술적이고 전술적 자원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연습은 축구의 실제를 변형시켰다.

 

감독, 위태로운 직책


축구 감독이 단지 축구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엄청난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감독은 팀 관리자들이 클럽에 한 목표를 어떻게 해서든 달성해야 한다. 그렇지만 축구라는 것은 막대한 투자와 시장조사가 결과에 절대적인을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축구의 결과에는 팀의 응집력, 다시 말해 팀의 능률을 좌우하는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와 무엇보다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후원자와 구단주는 걸핏하면 감독의 경질을 들고 나온다. 자신만의 직감, 신념, 고지식함에 따라 팀 관리자들은 축구에 정통한 전문가, 전제적이라 소문난 트레이너, 기적을 일궈낸 마술사라 평가받는 특별한 인물들 남아메리카의 몇몇 인물들이나 루마니아의 스테판 코바치스 같은 인물들을 영입한다. 한 국가의 축구에 바쳐지는 명성은 그 대표팀 감독에게도 파급되었다. 영국인의 뒤를 이은 아르헨티나인과 브라질인, 1970년 이후의 네덜란드인, 그리고 유고인과 서부 유럽인이 그러한 경우이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튕겨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독일에서나 프랑스에서나 1년 내내 감독의 경질이 계속된다.

 

영국 패권 이후, 서열의 변동


1910년까지는 영국의 아마추어 팀들이 유럽 대륙의 모든 팀들을 격파했다. 1906년과 1910년 사이에 프랑스는 15대 0, 12대 0, 10대 1로 영국에게 졌다. 1908년에 2대 0으로 진 덴마크만 그런대로 체면을 살릴 수 있었다. 191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영국이 국외 경기에서 몇 차례 패배를 맛본 적도 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에게 졌고 1921년에는 프랑스에게도 2대 1로 졌다. F.A.는 프로 선수들을 투입했고 영국의 무적행진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에 열린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올림픽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1930년의 제1회 월드컵을 차지하며 훌륭한 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영국은 그 경기들이나 이후의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최고가 어떤 팀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1934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월드컵을 차지한 이탈리아와 명성을 날렸던 오스트리아의 대표팀인 분더팀(Wunderteam)도 훌륭한 팀들이었다.

1953년, 영국의 홈경기에서 영국의 무적행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환상의 플레이를 보여준 헝가리 팀이었다. 푸스카스와 코치시스를 비롯한 뛰어난 선수들이 영국을 6대 3으로 격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헝가리 팀은 이듬해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더 많은 점수차로 영국을 제압했다(7대 1). 1958년부터 1970년까지 헝가리 팀의 뒤를 이은 것은 펠레가 있는 브라질 팀이었다. 그 이후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군림했고 마라도나와 켐페스를 지닌 아르헨티나가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루메니게를 앞세운 독일도 그런 팀들에 만만치 않게 대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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