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독일)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제4회 동계올림픽이 1936년 2월 6일~2월 16일까지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개최되었다.  앙리 드 바이에-라투르 백작이 IOC 위원장으로서 세 번째 동계올림픽대회를 주재했다. 프랑스 국가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쥐스티니엥 드 클라리 백작에서 아르망 마사르(Armand Massard)로 바뀌었다. 이번 대회에는 28개국을 대표하는 646명(남 566, 80)의 선수가 참가했다. 대회 개막은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가 했고, 선서는 노르딕스키 선수 빌헬름 보그너(Wilhelm Bogner)가 했다. 11일에 걸친 대회를 통해 4개 스포츠 17개 종목의 경기가 치러져, 235,000명의 관객 앞에서 합계 51개의 메달이 수여되었다.

이번 제4회 동계올림픽대회는 준비에 빈틈이 없었다. 나치정권을 위해 홍보장관인 괴벨스는 독일이 대규모 행사를 치를 수 있다는 능력을 세계 다른 나라에 과시할 수 있도록 특별자금을 방출했다. 그에 따라 대규모 공사를 벌여 거대한 실내경기장에서 스케이팅 경기를 수용하게 되고, 대표단을 위한 숙박 기반시설이 갖춰졌다. 이번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대회는 독일 제3제국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6개월 후에 벌어질 제9회 하계올림픽대회를 위한 '총연습'이었다.

1932년 IOC의 결정에 따라 남녀 알파인복합경기를 포함한 4개 종목이 채택되었다. 알파인복합경기는 활강경기와 알파인스키로 구성된다. 밀리터리 패트롤과 컬링, 두 개의 시범경기가 다시 선을 보였다. 기이하게도 이번 대회에서 최고의 참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나라와 미국에서, 나치의 영광을 위해 벌이는 이번 대회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월 6일 28개국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행진을 벌였다. 레이크플래시드에서 16개국이었던 것과 대비되는 일이었다. 그리스, 에스파냐, 불가리아, 호주, 리히텐슈타인 그리고 터키 등 6개 나라가 새로 들어왔다. 또다른 기록이 갱신되었다. 참가 선수 숫자가 4년 전 252명이었던 것이 646명으로 늘어났다. 독일은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한 그들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1933년 6월 8일, 빈에서 열린 제31차 회의에서 IOC는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두 지자체가 제4회 동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월 6일 금요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히틀러는 "가파"(GA-PA) 대회 개회를 선언했다. '에퀴프'지(Equipe의 전신인 '오토지(Auto는 이 개막식을 레이몽 페리에(Raymond Pemier) 기자의 기사를 통해 다시 경험하게 해준다.

"오늘 아침, 스키 경기장에서 히틀러 수상의 주재 아래 전통적인 올림픽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지도자는 깊고 그윽한 목소리로 올림픽의 해가 다가왔음을 선언했다.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위엄과 위대함, 고귀함 그리고 이상이라는 말들이 뜻이 빈말은 아니었다. 만국의 가지각색 국기로 둘러싸인 경기장에 모인 3만이 넘는 관중들에게는 이 장엄한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올림픽 기운'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통령인 폰트가 짧지만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메시지는 최대로 다양한 인종이 스포츠를 섬기는 일념으로 모여 기쁨을 말하는 이번 행사에 가치를 더했다. 폰 할트 대통령은 직접 히틀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대회의 주인인 지도자께서 이번 제4차 동계올림픽대회 개회를 선언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자 지도자는 깊은 인상을 주는 침묵 속에서 마이크 앞으로 나와 새로운 스포츠의 해가 다가왔음을 선언했다. 이와 함께 즉시 합주단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만국연합 찬가를 연주했다. 산에서 축포가 터지고, 스키 점프대 위쪽에서 대회 마지막 날까지 꺼지지 않을 성화가 불타는 것이 보였다."

레이몽 페리에는 덧붙였다. “물론 히틀러 수상이 도착하자 "하일 히틀러!" 하고 큰소리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팔을 내밀고 국가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대표단 행진이 벌어져, 히틀러와 앙리 바이에-라투르 백작뿐만 아니라 앙드레-프랑수아 퐁세 프랑스 대사와 같은 인물들 앞을 지났다. 이번 대회와 개회식 사진은 행사를 취재하도록 허락된 독일 사진사들만 찍을 수 있었다.

이 대회는 또 다시 소냐 헤니가 그녀의 모든 재능을 보여줄 기회였다. 제4회 동계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전, 소냐 헤니는 자신의 아마추어 경력은 “가파" 올림픽 폐막 일주일 후에 열리도록 되어있는 1936 세계 챔피언십 뒤에 끝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2월 15일이 되자, 이제는 더 이상 넓은 실내링크에서 "빙판의 요정"을 바라볼 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24세의 나이에 마지막 올림픽 경기를 치른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가볍고 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세실리아 컬리지(Cecilia Colledge)라는 어린 스케이팅 선수가 헤니의 평온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이 영국출신 선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레이크플래시드에 모습을 드러내고 8위 자리에 올랐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는 법이라 소냐 헤니는 세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게 젊은 노르웨이 아가씨는 특유의 점프와 곡예로 피겨스케이팅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현대 피겨스케이팅의 선구자가 되었다. 1936년 그녀는 프로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어 미국에서 댄스공연을 열었고, 헐리우드는 그녀에게 무시하지 못할 액수를 보장하는 계약을 제안했다.

소냐 헤니는 올림픽에 연속 세 번 출전해서 세 개의 금메달을 따고, 1927년부터 1936년 사이 세계피언십에서 열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지금까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한 걸출한 챔피언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또한 1932년 1936년 사이에 "그랜드슬램"을 두 번 달성했다. 하지만 그녀는 57세에 백혈병에 걸려 1969년 10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빙속 경기에서 핀란드 클라스 툰베리의 뒤를 이은 주인공은 이바르 발랑루(Nar Ballangrud)라는 이름의 노르웨이 선수였다. 이 선수는 오랫동안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으로 주목 받았다. 1928년 이미 그는 5,000m에서 우승하고 1,500m에서 3위에 올라 노르웨이의 국기가 생모리츠 하늘 높이 휘날렸다. 1932년이 되어 이바르 발랑루는 10,000m에 출전했다. 비록 이 경기가 그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그는 세 번째 메달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 전 5,000m에서 우승을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5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부진은 분명 국제빙상연맹이동일선 출발을 시행토록 한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바르 발랑루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1936년 올림픽대회에서였다. 그는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 그리고 동메달 1개를 22세의 젊은 독일 여자선수인 크리스틀 크란츠(Christ Cranz)는 새로 지정된 알파인스키복합경기의 우승 후보였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이 새로운 경기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1936년 이래 이 경기에서 노르웨이선수 비르이르 루드는 활강에서 우승하고 같은 나라 여자선수인 라일라 쇼우닐센(Laila Schou-Nilsen)은 복합경기에서 3위를 차지했다. 2월 7일 아침, 모든 조건이 최상이었다. 양호한 눈 상태에다 날씨는 춥고 건조했다. 활강경기가 크로이첵 코스에서 벌어졌다. 크리스틀 크란츠에게 출발신호가 내려졌다. 하지만 그녀가 넘어지는 바람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초 차이로 5등을 차지했다. 여자 알파인 복합경기 역사상 최초의 활강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노르웨이의 라일라 쇼우-닐센이었다. 다음날 아침, 독일 챔피언인 크리스틀 크란츠는 같은 독일선수인 2위 그라제거를 11초 앞서 우승하여 알파인스키 2회전 선두를 차지했다.

크리스틀 크란츠는 스키 역사상 알파인 복합경기에서 우승한 최초의 여자선수다. 수상자 명단에는 또 다른 독일선수인 캐트 그라제거(Käthe Grasegger)가 은메달을 따고, 5개 빙속 세계기록 보유자인 노르웨이 선수 쇼우-닐센이 3위에 올랐다. 남녀 알파인 복합경기 덕분에 독일은 2개의 올림픽 타이틀과 2개의 2위 자리를 차지했다. 머지않아 알파인스키 경기는 최고의 인기 경기 특히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즐기는 전통적인 노르딕스키 경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 대표단은 24세의 젊은 사부아 출신 에밀 알레(Émile Allais)선수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이 장사를 하는 므제브에서 스키에 입문해서 선수가 되었다. 2월 7일, 활강선수들이 숲을 가로질러 노이너 코스로 내려오도록 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예상과는 달리, 활강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노르웨이 점프선수인 비르르 루드였다. 그는 트랙을 내려오는 동안 중간에 바위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점프 실력을 활용할 수 있었고, 4분 47초4/100의 기록으로 2위를 14초 앞질러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선수 에밀은 평균시간 4분 58초 8/10으로 4위에 그쳤다. 프랑스팀은 장비와 준비 부족을 부진의 원인으로 돌렸다.

2월 9일이 되어 두 번째 경기인 알파인스키 출발신호가 구디베르크 코스에서 주어졌다. 활강에서 2위를 차지한 젊은 독일선수 프란츠 프뉘어 (Franz Pinur)가 승리를 낚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알파인 복합경기의 올림픽챔피언 타이틀을 얻었다. 또 다른 독일선수인 구스타프 란트슈너(GustavLantschner)는 알파인스키의 2위와 복합경기 또한 2위를 차지했다. 에밀 알레는 또다시 알파인스키에서 1위에 11초 뒤지는 중간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3위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파인스키 역사상 최초의 복합경기에서 3위를 차지함으로써 에밀 알레는 프랑스선수로서 동계올림픽대회 스키 수상자 명단에 첫 번째로 기록되는 선수로 남게 되었다.

이번 대회에 프랑스 대표단은 단지 36명으로 구성되었고,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전체 참가국 가운데 노르웨이가 금 7, 은 5. 동 3 합계 15개의 메달을 차지하여 1위 자리에 올랐고, 6개의 메달을 딴 독일이 스웨덴에 앞서 2위에 올랐다.

선전부 장관인 괴벨스가 직접 나서 준비한 이번 동계올림픽대회는 나치 선전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만족스런 기상조건에서 열린 최초의 대회였다. 2월 6일부터 16일까지 모든 경기는 춥고 건조한 날씨 가운데 푸른 하늘 아래서 벌어졌다. 폐회식 다음날이 되자 "가-파" 지역에 비가 내렸다.

노르웨이 선수 발랑루가 빙속에서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더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IOC는 이전에 개최되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훌륭한 대회를 독일이 개최한 것을 축하하면서 대회의 막을 내렸다. 바이에-라투르 위원장은 폐회 다음날인 2월 17일 이렇게 선언했다"제4회 동계올림픽대회는 IOC가 걸었던 희망을 충분히 실현했습니다. 현대 올림픽 역사를 통틀어 동계올림픽에 이같이 많이 참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선수들은 이처럼 수준 높은 경기에 나서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대회를 유치한 국민들에게서 이처럼 생기 넘치고 즐거운 반응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수준급의 경기장에서 벌어진 기사도정신이 발휘된 수준 높은 경기를 통해 동계스포츠가 갖고 있는 스포츠와 교육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제4회 동계올림픽 대회가 국민들을 통합하려는 올림픽 정신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고 확신합니다."

레이크플래시드에서 참가국 가운데 9위에 머물렀던 독일은 이제 노르웨이에 이어 2위로 올라섰다. 끝으로, 스포츠는 단지 선수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라 국가의 대사이며 한 나라를 보여주는 창이 되었다. 대회가 끝난 바로 직후, 사해동포를 찬양하는 멋진 연설을 하고 3주가 지나서 독일은 라인란트를 재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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